
패션 비평의 죽음
크리스티나 카쿠리스(Christina Cacouris)
2025년 3월
어머니는 늘 내게 패션이란 시대의 감수성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씀하셨다. 1940년대 전후(戰後) 패션을 뒤바꾼 모래시계 실루엣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은 패션을 "덧없는 건축(Ephemeral Architecture)"이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은 너무나 자주 사치스럽고 정치와 무관하거나 정치적 감각이 결여된 허영의 전시 정도로 치부된다. 그렇기에 패션 비평 역시 깊이 있고 사려 깊은 논의를 위한 시간과 지면을 충분히 얻지 못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수전 손택이 《보그》에 아름다움에 관한 글을 쓰던 시절만 해도 지식인들은 패션을 자신의 지적 탐구보다 아래에 있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런웨이 컬렉션과 권력자들의 몸 위에 걸쳐진 옷의 형태를 진지하게 분석하던 지성들은 점차 전면에서 사라졌다. 우리는 책, 영화, 음악 평론가들의 이름은 수도 없이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패션 평론가는 세 명이나 말할 수 있을까?
아니, 한 명이라도 떠오르는가?
이러한 공백은 최근 들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난 1월 오트 쿠튀르 쇼가 막을 내렸을 때, 나 역시 많은 사람들처럼 스키아파렐리의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컬렉션에 매료되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니엘 로즈베리는 지난 5년 동안 브랜드를 눈부시게 부활시켰다. 그는 창립자 엘사 스키아파렐리가 남긴 초현실주의적 유산, 장 콕토를 연상시키는 얼굴과 살바도르 달리를 떠올리게 하는 형태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그러나 이번 컬렉션은 또 다른 영감의 원천에서 출발했다.
2025 봄·여름 오트 쿠튀르 컬렉션 〈이카루스(Icarus)〉의 쇼 노트에서 로즈베리는 이렇게 적었다.
"지난해 나는 1920~30년대 리옹에서 제작되었다가 독일의 프랑스 침공 당시 숨겨졌던 빈티지 리본들을 발견했다. 그것들을 손끝으로 만지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은 '오래되었기에 오히려 새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현대성을 지나치게 단순함과 동일시한다. 하지만 새로운 것이 반드시 단순해야만 하는가? 정교하고, 바로크적이며, 화려할 수도 있지 않은가."
나 역시 어느 정도는 향락주의자이기에 그의 제안은 무척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이번 컬렉션 역시 이전 작품들처럼 쇼장을 가득 메운 고객과 기자들의 감탄을 이끌어냈다. 마담 그레, 찰스 프레더릭 워스, 폴 푸아레 등 황금기의 쿠튀르 거장들이 남긴 디자인 언어를 로즈베리 특유의 바로크 미학으로 다시 빚어낸 우아한 헌사였다.
스키아파렐리가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사람들이 숭고한 아름다움에 굶주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품은 마치 거대한 자연현상을 마주했을 때처럼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예술 작품으로서 이번 컬렉션은 경이롭다.
그러나 실제로 입는 옷의 컬렉션으로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내가 읽은 리뷰 가운데 이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 사람은 독립 패션 비평가 마틴 레르마뿐이었다. 그의 서브스택 **『No Sale』**에서 그는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이 옷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쿠튀르는 하나의 정신이다.
역사적으로 쿠튀르 디자이너들은 단순히 미학만 제시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옷을 입히는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더 나아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제안해왔다.



샤넬은 남성 수트만큼 실용적인 여성의 유니폼을 만들었고, 양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숄더백을 고안했다. 발렌시아가는 건축적인 실루엣으로 다양한 체형을 아름답게 감싸면서 긴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이로우 헴을 도입했다. 생 로랑은 이전까지 프리코드 시대 할리우드 영화와 일부 레즈비언 공동체에서만 볼 수 있었던 여성 턱시도를 대중에게 선보이며 여성들이 저녁 자리에 보다 자유롭게 입을 수 있는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했다.
반면 로즈베리의 옷이 오늘날 스키아파렐리 고객들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레르마는 묻는다.
등의 코르셋 끈이 목부터 치맛단까지 이어져 있는데, 이런 옷을 어떻게 입을 수 있는가? 어떻게 앉고, 어떻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가?
패션은 응용예술이다. 아름답기만 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기능성 역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전 세계 수천 명 남짓한 고객만을 위한 쿠튀르라 해도(브랜드들이 발표하는 고객 수는 늘 의심스럽다), 여성들은 정말 입을 수도 없는 수억 원짜리 드레스보다 더 흥미로운 무언가를 누릴 자격이 있지 않은가?

뉴욕 매거진의 캐시 호린, 아마도 현재 남아 있는 마지막 주류 패션 비평가 가운데 한 명인 그녀도 이런 문제를 암시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 사람은 레르마 외에는 보지 못했다. 물론 오늘날 쿠튀르는 과거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제작비가 너무 비싸져 실제로 입는 옷이 아니라 브랜드를 위한 마케팅 플랫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부 브랜드에는 분명 사실이다.
가장 많은 쿠튀르 고객을 보유했다고 주장하는 샤넬은 이미 오래전부터 수익성이 사라진 쿠튀르 판매가 아니라, 샤넬 쿠튀르를 최고의 우아함이라 믿는 여성들이 48달러짜리 립스틱을 사면서 브랜드의 일부를 소유한다고 느끼게 만드는 구조에 의존한다. 반대로 스키아파렐리에게는 대중을 위한 뷰티 라인이 없다. 기성복 역시 쿠튀르보다야 열 배쯤 저렴하겠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패션 애호가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가격이다. 사실 스키아파렐리라는 브랜드 자체를 아는 사람도 패션 애호가들뿐이다.
그렇다면 1년에 두 번 파리 쇼장을 가득 메우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 옷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하지만 어쩌면 이런 질문은 레르마처럼 독립적인 위치에 있어야만 던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유명 패션 평론가들은 혹평을 썼다는 이유로 쇼 출입이 금지되곤 했다. 그러다 다시 초대받고, 또다시

금지당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들은 돈과 권력을, 옷을, 디자이너를, 그리고 그 옷을 입은 사람들까지 거리낌 없이 비판했다. 한때 패션계는 수지 멘키스의 다음 리뷰를 숨죽이며 기다리곤 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현재의 《인터내셔널 뉴욕 타임스》)에서 26년 동안 패션 에디터를 맡았던 그녀는 두려움을 몰랐다. 그녀 역시 혹독한 비평 때문에 여러 차례 쇼 출입 금지를 당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20여 년 전 그녀가 쓴 쿠튀르 리뷰를 읽으면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2004년 요지 야마모토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야마모토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테일러링 덕분에 쿠튀르 디자이너라 불릴 자격이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런 것들을 이미 여러 번 보았지만."
존 갈리아노의 디올 컬렉션에 대해서는 이렇게 평가했다.
"이 쇼는 경이로우면서도 동시에 불안했다. 갈리아노는 쿠튀르 역사상 가장 놀랍고 시적이며 뛰어난 디자이너인가? 아니면 디올이라는 집이 화려한 외관 뒤에서 팔릴 제품들을 만들어내는 동안 새로운 차원의 2차원 쿠튀르를 발명한 의상 디자이너에 불과한가?"
그러나 그런 시대는 이제 사라졌다.
오늘날 수지 멘키스는 깊이 있는 리포트 대신 찬사를 늘어놓는 인스타그램 캡션을 쓰고 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짚어내기 어렵지만, 지난 몇 년 사이 무언가가 분명 달라졌다.
멘키스는 2022년 패션 매체 1 Granary와의 인터뷰에서 진정한 비평의 세계가 점점 축소되는 현실을 이야기하며, 마치 미래를 내다본 사람처럼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강하고 단호한 의견을 내놓으려는 의지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최근 권력층이 입는 옷을 둘러싼 논의를 보면 그의 말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옷 자체만이 아니라, 그 옷을 입는 권력자 역시 비평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패션과 정치의 관계는 오랜 역사를 지닌다. 수많은 정치 운동은 자신들만의 미학과 제복, 스타일을 만들어냈으며, 권력자들의 의복 선택은 그들이 옷을 입기 시작한 순간부터 줄곧 대중의 평가를 받아왔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떠올려보자.
1780년대 당시 프랑스 왕비를 향한 여론은 이미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결국 그녀는 어떤 일이 있었든 단두대에 올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실수 가운데 하나는 면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것이었다. 무더운 여름날, 가볍고 얇은 모슬린은 궁정 행사에서 입던 무겁고 뻣뻣한 비단 드레스보다 훨씬 편안했다.
1783년, 왕실 화가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은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 살롱전에 출품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공개했다. 그림 속 왕비는 흰색 모슬린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부드럽게 흩날리는 천과 장미빛 뺨, 곁에 핀 꽃들이 어우러져 전원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거센 논란이 일었다.
비제 르브룅은 곧바로 작품을 전시장에서 철수해야 했다.
왕비가 이렇게 목가적인 차림으로 묘사된 것은 품위에 어긋났을 뿐 아니라, 프랑스 경제의 핵심 산업 가운데 하나였던 리옹의 비단 산업을 모욕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바로 훗날 다니엘 로즈베리가 사랑하게 될 리본을 만들던 그 리옹의 직조공들이다.) 더욱이 그녀가 입은 모슬린은 영국이 인도 식민지에서 생산하던 직물로 여겨졌다. 이는 비애국적이며, 심지어 반역 행위처럼 보였다.
10년 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외세와 공모했다는 혐의로 처형된다.
물론 그녀가 죽은 이유는 단순히 옷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드레스는 그녀의 '배신'을 상징하는 하나의 표상이 되었다. 의복이 가진 의미는 실 한 올까지도 정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패션 평론가는 최신 컬렉션을 분석하는 만큼이나 권력자들의 옷차림과 그 상징성을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너무 적다. 이는 패션 비평가들이 집단적으로 자신의 책무를 방기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인물인 만큼, 멜라니아 트럼프의 의상 역시 오랫동안 패션 비평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한때 가장 뛰어난 패션 비평가 가운데 한 명이었던 《뉴욕 타임스》의 바네사 프리드먼은 멜라니아의 백악관 공식 초상화 속 의상을 다룬 글을 썼다. 하지만 그것을 '리뷰'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비평'이라는 말에는 가치 판단이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Critic's Notebook'이라는 제목 아래 프리드먼은 이렇게 묘사한다.
"멜라니아는 커머번드와 흰 셔츠를 갖춘 돌체앤가바나 턱시도를 입고 있다. 셔츠 단추 두 개는 풀려 있으며, 워싱턴 기념탑을 배경으로 광택 나는 책상 위에 두 손을 모은 채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살짝 기울어진 자세와 정돈된 웨이브 헤어는 마치 국가를 직접 지도할 준비가 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프리드먼은 돌체앤가바나라는 브랜드가 지닌 정치적 함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그 빈자리를 내가 채워보겠다.
돌체앤가바나는 과거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여러 차례 논란을 일으켰고, 온라인상에서 증오 표현을 퍼뜨려 왔다. 이는 멜라니아가 과거 추진했던 'Be Best' 캠페인의 취지와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또한 두 디자이너는 시험관 시술(IVF)에 공개적으로 반대해왔으며, 동성 커플의 양육권에도 지속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혀왔다.
특히 이번 선거에서 재생산 권리가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였고, 동성혼 합법화를 뒤집으려는 움직임이 다시 등장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프리드먼이 이런 맥락을 완전히 생략한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멜라니아가 백악관 공식 초상화에서 돌체앤가바나를 선택한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첫 번째 초상화에서는 프리드먼조차도, 최소한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우는 행정부의 영부인이 유럽 브랜드만 고집하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라고 조심스럽게 지적한 바 있다. 영부인의 역할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영부인이 무엇을 입느냐가 경제에 실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미셸 오바마가 J.Crew와 Gap 같은 미국 브랜드를 즐겨 입었을 당시, 《Harvard Business Review》는 그녀의 선택이 29개 기업에 총 27억 달러 규모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했다고 분석했다.
상징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영부인 브리지트 마크롱이 거의 항상 프랑스 디자이너들의 옷을 입는 것은 애국심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현이다.
패션은 예술이다.
그렇기에 정교하고 깊이 있는 비평을 받을 자격이 있다.
동시에 패션은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하나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더욱 치밀한 분석과 해석이 필요하다.
전자를 위해서는 뛰어난 심미안과 스타일을 언어로 풀어내는 능력이 요구된다.
후자를 위해서는 역사와 정치, 그리고 윤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다.
패션에서도, 그리고 세상의 다른 모든 영역에서처럼.
이제는 다시 두려움 없는 비평이 돌아와야 한다.
출처: https://libertiesjournal.com/online-articles/deathofthefashioncritic3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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